한국영화의 역사

한국영화의 역사〔개설〕[편집]

韓國映畵-歷史〔槪說〕 우리나라에 구미영화(歐美映畵)가 들어와서 상영된 시기는 대략 1900년 초기로 추산되고 있으며, 루이 뤼미에르(Louis Lumiere)가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e)를 발명하여 이른바 활동사진을 발명한 시기가 1895년이고 보면 세계의 영화사(史) 80년이라는 연륜 속에서 한국영화사와의 시간적 차이가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영화가 상영된 시기를 좀더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면, 1903년 인천에 들어왔던 영미연초회사(英美煙草會社)에서 담배를 선전하기 위하여 창고에서 활동사진 즉 영화를 처음 공개했던 것을 들 수 있다. 관람권은 빈 담배갑 스무개였는데, 당시 담배 한 갑에 23전씩 할 때였으니 관람료치고는 비싼 편이었다. 그 뒤 1909년 미국인 골브란(Golbran)이 한성전기회사(漢城電氣會社) 동대문 창고에 흥행장(興行場)인 상설관(常設館)을 두고 활동사진을 보여주었다. 한국영화의 효시(嚆矢)는 1919년 10월 27일 김도산(金陶山) 등이 신극좌(新劇座)에서 공연 중, 무대에서 표현할 수 없는 부분만을 활동사진으로 찍어서 보여 주었던 연쇄극영화(連鎖劇映畵)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로 볼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국영화의 맹아기(萌芽期)의 소산으로 기록되는 것이며, 본격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우리나라 영화로 기록될 작품은 아무래도 1923년 윤백남(尹白南)이 발표했던 <월하(月下)의 맹세(盟誓)>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일본제국이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를 통해 저축을 장려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일종의 선전영화였다. 윤백남(尹白南)이 스스로 각본과 감독을 맡았던 이 영화에는 한국영화배우의 시조격인 이월화(李月華)와 권일청(權日晴)이 처음으로 데뷔하기도 했다. 그 뒤 1924년 한국 최초의 장편 극영화 <장화홍련전(薔花紅蓮傳)>이 당시 단성사(團成社) 사장 박승필(朴承弼) 제작, 김영환(金永換) 감독, 이필우(李弼雨) 촬영으로 완성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기도 했다. 이 영화야말로 일인(日人)의 손을 빌지 않고 순수한 우리나라 영화인의 손에 의해서 완성되었다는 데에 의의를 둘 수 있겠다. 또한 1925년 윤백남이 감독한 <운영전(雲英傳)>에는 춘사(春史) 나운규(羅雲奎)가 교군(轎軍) 역(단역배우)으로 처음 등장하기도 했다. 1925년 이경손(李慶孫)은 윤백남 프로덕션 작품으로 <심청전>을 만들면서 당시 인텔리 여성 김정숙(金靜淑)을 데뷔시켜 보았지만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고, 그 뒤 ‘고려키네마’를 설립, 춘원(春園)원작의 <개척자(開拓者)>(1925)를 완성시켰다. 한편, 이규설(李圭卨)은 일인 요도(淀) 및 나운규와 더불어 새로 창립한 ‘조선키네마’ 작품으로 <농중조(籠中鳥)>를 감독했는데, 이 작품을 통해서 나운규가 비로소 연기인의 자리를 굳혔고, 복혜숙(卜惠淑)은 첫 데뷔를 했던 것이다. 이 회사의 제2회작은 저 유명한 나운규의 출세작 <아리랑>이었는데, 이 한편의 영화에서 나운규는 각색·감독·주연을 함께 맡았으며, 여배우로는 신일선(申一仙)을 등장시켰다. 그 내용은 민족감정을 고취시킨 것이었는데, 전국에서 파상적(波狀的)인 인기를 휘몰아 크게 히트하였다. 이후 나운규는 조선키네마의 4번타자(打者)격인 신임을 받아 3회 작품 <풍운아(風雲兒)>(1926), 4회 작품 <들쥐>(1927)를 각색 감독·주연으로 완성하였는데, 이때 윤봉춘(尹逢春)이 배우로서 첫 출연을 하게 되었다. 같은해 소설가 심훈(沈熏)이 <먼동이 틀 때>로 데뷔했고, 황운(黃雲)이 <낙원(樂園)을 찾는 무리들>을 감독했으며, 이 영화에 전옥(全玉)이 처음으로 스크린(screan)에 얼굴을 보였다. 1932년에는 이규환이 <임자없는 나룻배>를 발표하여 춘사(春史) 이래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았고, 이어서 1935년 <바다여 말하라>를 세상에 내놓았다. 여기까지가 대략 한국영화사상 무성영화(無聲映畵)시대의 문제작들이었으며, 그 뒤 1935년에는 이명우(李明雨)가 최초 발성영화(發聲映畵)인 <춘향전>을 발표하여 한국영화계는 토키(talkie) 시대로 접어들었는데, 같은해 김상진(金尙鎭)은 최초의 음악영화(音樂映畵)라 할 수 있는 <노래하는 조선(朝鮮)>을 발표했고, 1930년 이규환이 감독한 <나그네>는 발성영화시대의 최고작(最高作)으로 평가를 받았다. 그 후 일제는 한국영화를 송두리째 없애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소위 조선영화법(朝鮮映畵法)이라는 것을 제정하였고, 마침내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한국영화계를 묶을 속셈으로 이른바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朝鮮映畵製作株式會社)를 만들어, 모든 단체를 강제로 통합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한국영화는 암흑길로 접어들었다. 1945년 8월 15일. 꿈에도 그리던 조국광복(祖國光復)의 날은 왔고, 한동안 동면기(冬眠期)에 있었던 영화인들이 서서히 일어나 또다시 영화예술을 꽃피우게 되었다. 1946년에 최인규가 고려영화사(高麗映畵社)를 창립하고 <자유만세(自由萬歲)>를 만들어 흥행에 크게 성공했으며, 뒤를 이어 이구영의 <안중근(安重根) 사기>, 윤봉춘의 <윤봉길(尹奉吉)의사>, 전창근의 <해방된 내고향>, 이규환의 <똘똘이의 모험>, 김소동(金蘇東)의 <모란등기(牡丹燈記)> 등이 발표되었다. 그 뒤 1947년에 윤봉춘의 <유관순>, 신경균(申敬均)의 <새로운 맹세>, 최인규의 <죄없는 죄인>, 이규환의 <갈매기>가 나왔는데, 특히 <새로운 맹세>에서 최은희(崔銀姬)가 데뷔하기도 했다. 이듬해인 1948년에는 한형모(韓瀅模)가 <성벽을 뚫고>를 발표하여 크게 성공했다. 1950년 6·25전쟁기에 영화인들은 다시 한번 시련기에 처했지만, 각자 역경 속에서도 1952년 전창근은 <낙동강(洛東江)>을, 이만흥(李萬興)은 <애정산맥>을 발표했고, 같은 해 최인규 문하생(門下生)이던 신상옥(申相玉)이 <악야(惡夜)>로, 정창화(鄭昌和)가 <최후의 유혹>으로 각각 등장했다. 1954년 환도(還都)한 영화인들은 외화(外畵)의 홍수라는 새로운 도전 속에서도 줄기차게 영화를 만들었다. 1954년 김성민(金聖珉)의 <북위 41도>, 윤봉춘의 <고향의 노래>, 홍성기의 <출격명령>, 신상옥의 <코리아> 등이 나왔다. 이 해의 ‘영화평론가협회상(永畵評論家協會賞)’과, 한국영화 초창기의 공로자인 이금룡(李錦龍)을 추모하는 뜻에서 ‘금룡상(金龍賞)’이 제정되어 영화계에 활기를 주었고, 이강천의 <피아골>에서 김진규(金振奎)가 데뷔하기도 했다. 1955년 5월에는 전영화인과 관객들의 여망에 따라 국산 영화에 대한 면세조치가 취해져 이후 한국영화의 전성기(全盛期)를 맞이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해 개봉된 이규환의 <춘향전>은 당시 개봉관에서 1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는 등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1957년에는 최신 영화 기재(機材)를 도입한 안양촬영소(安養撮影所)의 준공을 보게 되었다. 편의상 한국영화의 시기(時期)를 3등분하여 제작편수(製作篇數)를 비교해 본다면, 1919년-1944년에 걸쳐 초창기에 제작된 영화편수가 166편, 1945년-1953년 과도기(過渡期)에 제작된 영화수가 86편, 1954년-1970년 중흥기(中興期)에 제작된 영화수가 2,021편이나 된다. 다시 말하면, 1955년 이후 국산영화 면세조치와 최신 영화 기재의 도입, 그리고 관객의 절대적인 호응이 영화인들을 크게 고무(鼓舞)한 결과가 되어, 54년 이래 영화 중흥기를 맞이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영화 산업의 전성(全盛)시기도 1968년 이후부터는 서서히 퇴조(退潮)하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텔레비전(television)이라고 하는 새로운 전파(電波) 미디어(media)의 강력한 도전, 그리고 이른바 대중오락(大衆娛樂)의 다극화(多極化)시대를 맞이하여 소위 영화예술만이 대중들의 절대적인 총애를 받던 시대는 이미 지나간 것이다. 그리고 한국영화계는 일제말(日帝末)의 수난기(受難期), 6·25의 진통기(陣痛期)를 거쳐, 제3의 시련(試練)인 불황기(不況期)에 접어든 것이다. 물론 1960년대 초반부터 중반 이후까지 일종의 붐을 형성(形成)했었던 청춘영화(靑春映畵)라든가 문예영화(文藝映畵)라는 새로운 장르의 영화들이 등장, 한때나마 활기를 띠었던 것도 인정할 수는 있다. 특히 신성일은 이 무렵 <맨발의 청춘(靑春)> <청춘교실(靑春敎室)> <흑맥(黑麥)> 등의 영화를 통하여 한국적인 의미의 스타시스템을 구축했으며, 문예영화(文藝映畵)쪽에서는 1961년 신상옥(申相玉)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와 유현목(兪賢穆)의 <오발탄(誤發彈)>, 1965년 김수용(金洙容)의 <갯마을>, 1966년 이만희(李晩熙)의 <만추(晩秋)>, 1969년 최하원(崔夏園)의 <독 짓는 늙은이> 같은 수작(秀作)들이 쏟아져나와 한국 영화의 질(質)을 높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또다시 참담한 불황(不況)의 벽(壁)에 부딪쳐 허덕이다가, 1974년 이장호(李長鎬)의 <별들의 고향(故鄕)>, 1977년 김호선(金鎬善)의 <겨울여자>로 차츰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일수록 한국영화에 기록된 선배들의 끈질긴 예술적 전통과 영화적 정열을 이어받아 더욱 분발한다면, 결코 대중들은 영화예술을 외면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邊 仁 植>

창조기의 한국영화[편집]

의리적 구투[편집]

義理的仇鬪 1919년 신극좌(新劇座)의 김도산(金陶山) 일행이 연극 공연시 사용하기 위하여 촬영한 것으로, <연쇄극영화(連鎖劇映畵)>라고 불렀으며, 이 작품이 한국인의 손으로 만든 우리나라 영화의 효시(嚆矢)가 된다. 제작은 단성사(團成社)의 대표였던 박승필(朴承弼)이 맡았고, 김도산(金陶山), 이경환(李敬煥) 등이 출연했는데, 내용은 주로 권선징악(勸善懲惡)을 주제로 삼고 있었다.

월하의 맹세[편집]

月下-盟誓 1923년 4월 9일 개봉된 영화로서, 규격은 35밀리 3권(卷)의 무성(無聲)으로 된 일종의 계몽영화였다. 윤백남(尹白南)이 각본·감독을 겸한 이 영화에서 한국 최초의 여배우라 할 수 있는 이월화(李月華)와 남우 권일청(權日晴)이 데뷔했다. 전국에 무료 상영된 이 영화는 조선총독부 체신국(遞信局)에서 저금장려(貯金奬勵)를 위해 만든 영화였다.

이월화[편집]

李月華(1905-1933) 윤백남 감독의 <월하의 맹세>(1923)에 처음 등장한 여우로서, 우리나라 여배우 제1호로 기록되고 있다. 원래 여명극단(黎明劇團)의 신인 여배우로서 신극을 했는데, 윤백남에게 픽업되었다. 그 뒤 왕필력(王必烈)의 <해(海)의 비곡(悲曲)>, 이규설(李圭卨)의 <뿔빠진 황소>에 출연하여, 천부적인 미모로 한때 두각(頭角)을 나타내었으나, 불행한 사생활(私生活)로 인해 끝내 대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권일청[편집]

權日晴(1898-?) 이월화(李月華)와 함께 <월하의 맹세>에서 처음 은막(銀幕)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성격이 매우 우직하고 비사교적이었다. 용모는 준수했으나 연기력이 뛰어나지 못해 그 후 연기활동이 부진했으며, 광복 후 이규환(李圭煥) 감독의 <심청전(沈淸傳)>에서는 심봉사 역을 맡았다.

춘향전[편집]

春香傳 1923년 개봉된 이 영화는 일본인 하야카와(旱川孤丹)가 동아문화협회(東亞文化協會)라는 회사의 이름으로 만든 작품이었다. 주연에는 이도령(李導令) 역에 변사(辯士) 김조성(金肇聲), 춘향에 기생 한용(韓龍)이 출연했던 영화였는데, 영화적 기술은 보잘 것이 없었지만 고전적(古典的) 소재였기 때문에 흥행에는 성공을 거두었다.

박승필[편집]

朴承弼(1875-1932) 한국영화의 요람기(搖藍期)에 활약했던 흥행사(興行師)로서, 김도산(金陶山)이 감독한 <의리적구투>를 비롯하여 여러 편의 연쇄극영화를 기획·제작했고, 광무대(光武臺), 단성사 등 흥행극장을 경영하는 한편, 나운규(羅雲奎) 등 민족영화인에게 자금을 제공해 주던 영화 초창기 공로자의 한 사람이다. 일본이 <춘향전>을 만들어 히트한 데에 자극을 받아 단성사 안에 영화 촬영부를 두고, 뒤에 <장화홍련전(薔花紅蓮傳)>을 제작하기도 했다.

장화홍련전[편집]

薔花紅蓮傳 단성사의 주인 박승필 제작, 박정현 기획, 김영환(金永換) 감독, 이필우(李弼雨) 촬영·녹음·편집·현상으로 된, 이른바 한국인 스태프와 캐스트로 된 최초의 본격적인 영화로 기록된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편집]

朝鮮 Kinema 株式會社 1924년 6월 부산에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세워졌다. 당시 공칭자본금 20만원을 적립하였다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던 이 회사의 사장은 일본인 나테(名出音一)였고, 연기진으로는 무대예술연구회 동인(同人)들과 영화인으로 안종화(安鍾和), 이채전(李彩田), 박승호(朴勝浩) 등이 가담하였다. 제1회 작품인 <해(海)의 비곡(悲曲)>을 비롯하여 <운영전(雲英傳)> <암광(闇光)> <신(神)의 장(粧)> <촌(村)의 영웅> 등 네 작품을 제작하였다.

안종화[편집]

安鍾和(1902-1966) 조선키네마의 제1회 작품인 <해(海)의 비곡(悲曲)>(왕필렬 감독)에서 처음 영화에 등장하였고, 그 뒤 윤백남(尹白南)감독의 <운영전(雲英傳)>에서 김진사(金進士) 역으로 출연하였다. 데뷔 당시 안종화의 용모는 귀공자상(貴公子像)이었고 성격은 깔끔했으며, 영화에 대한 정열이 대단했다고 전한다. 1930년 <꽃장사>를 감독한 이래 한국영화 반세기와 고락을 같이 했다.

윤백남프로덕션[편집]

尹白南production 1925년 윤백남은 서울시 을지로 5가에 사무실을 차려 놓고 ‘윤백남프로덕션’을 창립했다. 제1회 작품으로 <심청전>을 택한 후, 이경손(李慶孫)에게 감독을 맡겼다. 그러나 이 영화는 흥행에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윤백남은 이를 만회해 보려고 <심청전> 흥행차 일본에 건너갔으나 그 일마저 뜻대로 되지 않자, 결국 윤백남프로덕션은 해산하게 되고 말았다. 이 윤백남프로덕션은 최초의 프로덕션으로 기록된다.

조선키네마사[편집]

朝鮮Kinema社 일본인 요도(淀)라는 사람이 세운 프로덕션으로 제1회 작품 <농중조(籠中鳥)>를 비롯하여, <아리랑> <풍운아(風雲兒)> <들쥐> <금붕어> 같은 가작(佳作)을 발표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아리랑>을 제작한 점은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나운규[편집]

羅雲奎(1904-1940) 나운규는 안종화의 소개로 조선키네마에 머무르던 중,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雲英傳)>에 교군(轎軍)역으로 처음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 후 <농중조(籠中鳥)>에서부터 연기를 인정받기 시작했는데, 특히 1926년에 감독·주연했던 <아리랑>에서의 연기는 일생일대(一生一代)의 명연기였으며, 그 뒤에도 <임자없는 나룻배> <풍운아> <사랑을 찾아서> 등과 같은 영화에 출연하여 불세출의 연기자로서 한국영화사에 빛나는 자취를 남겼다. 나운규의 출연작품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1925년 <운영전(雲英傳)>1926년 <아리랑>, <농중조(籠中鳥)>, <풍운아(風雲兒)>1927년 <들쥐>, <잘있거라>, <흑(黑)과 백(白)>,<금붕어>1928년 <옥녀(玉女)>, <사나이>, <사랑을 찾아서>1929년 <벙어리 삼룡이>1930년 <아리랑 후편(後篇)>, <철인도(鐵人都)>1931년 <금강한(金剛恨)>, <임자없는 나룻배>1932년 <개화당이문(開花黨異聞)>1934년 <칠번통 소사건(七番通小事件)>1935년 <무화과(無花果)>, <그림자>1936년 <아리랑 삼편(三篇)>-나운규의 감독활동은 이 항에서 생략했음-

신일선[편집]

申一仙(1914-?) 1926년 나운규가 감독한 <아리랑>에서 혜성과 같이 등장하여, 심훈(沈熏) 각본·감독의 <먼동이 틀 때>, 이경손의 <봉황의 면류관>, 나운규의 <들쥐> <금붕어> <아리랑 후편> <아리랑 삼편(三篇)> 등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그 뒤에도 안종화의 <청춘의 십자로> <은하(銀河)에 흐르는 정열> 등에서 가냘픈 몸매로 인기를 끌었다.

복혜숙[편집]

卜惠淑(1904-1982) 1926년 이규설(李圭卨)의 <농중조(籠中鳥)>에 처음 출연했는데, 그때까지 그녀는 극단 ‘토월회(土月會)’에서 연극을 했었다. 나운규와 공연한 첫 작품에서 비교적 좋은 연기를 보였고, 1927년에는 이구영의 <낙화유수(落花流水)>에 출연하여 갈채를 받았다. 그 후 방송·영화를 통해서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으며, 배우협회(俳優協會)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윤봉춘[편집]

尹逢春(1902-1975) 1927년의 <들쥐>(나운규 감독)로 데뷔했다. 춘사(春史)와는 함북 회령(會寧)의 동향이며 학교도 함께 다녔고, 영화계에서 고락도 함께 나누었다. <사랑을 찾아서> (일명 <두만강을 건너서>)에서는 나운규·이금룡(李錦龍)·전옥(全玉) 등과 공연하여 훌륭한 연기를 남겼다. 1930년에는 <도적놈>이란 영화를 연출하면서 감독으로 전업하여 많은 명작을 남겼다((‘한국영화의 감독과 작품’항 참조).

무성영화 전성기의 한국영화[편집]

아리랑[편집]

일본인 요도(淀)가 설립한 조선키네마사의 제1회 작품이긴 하지만 철두철미하게 나운규의 민족혼이 서려 있는 민족의 저항시(詩)로서, 이 영화의 주제가인 <아리랑>을 부른 가수 이정숙(李正淑)은 이것으로 일약 유명해졌고, <아리랑>이란 민요가 이때부터 전국민의 애창곡(愛唱曲)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또한 이 영화의 각본은 이경손이 노트에 끄적여 놓은 ‘민요 가사’에서 힌트를 얻어 나운규가 각본으로 만든 것인데,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하면-어느 마을에 영진이란 광인(狂人)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누이동생인 영희를 광인다운 괴벽성과 결벽성으로 아끼고 사랑한다. 어느날 영진의 친구 현구가 이 마을에 온다. 독립운동을 하는 현구로선 그토록 영리했던 영진이가 폐인이 된 것이 못내 가슴아프다. 영희는 오빠를 대신해서 현구를 응대하다보니 둘이는 어느새 사랑이 움텄다. 그즈음 마을의 악덕 지주이자 친일파인 오기호가 은근히 영희에게 마음을 두고 수시로 접근해 왔다. 마을 잔치가 한창 흥겹게 벌어지던 어느날, 오기호는 떠들썩한 군중을 피해서 슬며시 영진네 집으로 와서 영희를 겁탈하려고 든다. 이때 영진이가 이 광경을 목도했지만 광인의 눈엔 한쌍의 연인처럼 비쳐 착각한 나머지 낄낄대며 박수까지 치고 있다. 이 순간 달려온 현구와 오기호 사이에 격투가 벌어지고, 엉겁결에 영진은 낫을 들고 오기호를 내려찍는다. 피를 본 순간 제정신이 돌아오고… 결국 영진은 살인범이 되어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 는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나운규는 세계영화계에서 몽타주 이론을 개발한 지 얼마 안 되는 때에 이 이론을 기법면에 활용했을 뿐만 아니라, 사막의 대상(隊商)들에게 물을 구하는 연인들의 환상장면을 넣는 등, 그 당시로서는 놀랄 만한 착상을 했으며, 이로 인하여 영화 <아리랑>은 전국 방방곡곡에까지 배달민족의 가슴을 쳤던 것이다.

나운규프로덕션[편집]

羅雲奎 production 1927년 9월 나운규는 동대문구 창신동에 ‘나운규프로덕션’을 차렸다. 자본가는 단성사 주인인 박승필이었고, 나운규는 여기에서 <잘있거라> <옥녀(玉女)> <사랑을 찾아서> <벙어리 삼룡(三龍)이> <사나이> 등을 제작했는데, 물론 각본·연출·주연을 겸했었다.

전옥[편집]

全玉(1921-1968) 1927년 황운(黃雲) 감독의 <낙원(樂園)을 찾는 무리들>에서 첫번째로 영화계에 발을 디뎠다. 마스크 자체가 ‘눈물의 여왕’답게 비극적인 인상을 풍기던 전옥(全玉)을 (당시 숙명여학교 교사였음) 스크린으로 이끌어 들인 사람은 바로 나운규였다. 그리해서 전옥은 나운규프로덕션의 전속으로 들어가 그의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이때 나온 작품으로 <잘 있거라>(1927), <옥녀(玉女)> <사랑을 찾아서> 등을 들 수 있다.

이금룡[편집]

李錦龍(1906-1955) 서울 출생. 현철(玄哲)·이구영 감독이 경영하던 조선배우학교를 수료하고 1926년 19세의 어린나이로 나운규의 <아리랑>에 단역(端役)으로 데뷔했다. 그 뒤 <풍운아> <들쥐> <사랑을 찾아서> 등에 출연하여 연기력을 인정받았으며, 특히 <들쥐>에서의 노역(老役)은 일품(逸品)이었다. 작고한 후에 그를 추모해서 ‘금룡상(金龍賞)’을 마련하여 영화인에게 수여하기도 했다.

승방비곡[편집]

僧房悲曲 최상덕(崔象德)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이경선·김연실·윤봉춘 등이 출연했고 이구영이 감독을 맡은 작품인데, 무성영화 시대의 큰 수확을 거둔 작품이었다.

임자 없는 나룻배[편집]

1932년 당시 일본에 있는 신흥키네마에서 수업한 후 귀국한 이규환의 데뷔작이다. 이 영화에서는 <버려진 조국>, 즉 아무도 돌보지 않는 망국(亡國)의 한(恨)을 수삼(壽三)이라고 하는 뱃사공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렸는데 특히 ‘문명 속에서 소외당하는 인간상’을 리얼리즘의 수법으로 묘사했다. 나운규의 <아리랑> 이래의 수작(秀作)으로, 한국 무성영화 전성시대를 마무리하는 작품이었다. 출연에는 나운규·문예봉·김연실·임운학 등이었다.

발성영화시대의 한국영화[편집]

토키 춘향전[편집]

talkie 春香傳 1935년 10월 4일 경성촬영소(京城撮影所)의 제작으로,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된 영화 <춘향전>은 한국 영화사상 최초의 발성영화였는데, 이기세(李基世) 원작, 이구영 각색, 이명우(李明雨) 감독·촬영, 이필우(李弼雨) 녹음 및 현상과 조명으로 되어 있고, 배역은 문예봉(文藝峰)·한일송(韓一松)·김연실·노재신(盧載信) 등이 맡았다. 이 영화의 기술 과정을 맡은 이필우는 두 차례나 일본에 건너가 최신 영화 기술을 배운 후 귀국하여, 카본 라이트를 전구 라이트 시스템으로 바꾸어서 100kW를 사용했고, 현상을 배트(vat)현상으로 하고, 프린터는 ‘벨 엘 호웰’을 사용하여, 이른바 기술적인 혁신을 시도했다. 흥행 결과도 성공적이었다.

노래 조선[편집]

-朝鮮 1936년 4월 18일 개봉된 영화로 <춘향전>을 제작했던 ‘경성촬영소’에서 제작했다. OK레코드의 전속 가수 일행들이 일본 오사카에서 무대공연을 하였을 때에 촬영했던 필름과, 국내에서 촬영한 <웃음거리 춘향전>을 섞어서 편집한 영화였는데, 한국 최초의 음악영화라 할 수 있다. 감독 김상진(金尙鎭), 촬영 이명우(李明雨), 출연 이난영(李蘭影)·임생부(林生負) 등이다.

아리랑 삼편[편집]

-三篇 1936년 5월 15일에 개봉되었으며, 한양영화사(漢陽映畵社)가 제작했다. 나운규의 재기작(再起作)이기도 한 이 영화에서 춘사(春史)는 이필우와 더불어 한국 최초의 발성영화의 기획·제작에 들어갔으나, 서로 뜻이 달라 헤어진 후 나운규가 완성을 하였는데, 녹음관계로 <춘향전>보다 늦게 개봉하여, 최초로 기획했으면서도 ‘최초’라는 명예를 빼앗긴 작품. 작품의 줄거리――옥에서 풀려나온 영진이는 편안한 나날을 보내다가 어느날 측량기사가 자기 누이동생을 겁탈하려는 것을 목격. 두 사람 사이에 격투가 벌어진다. 이로 인해 영진은 다시 정신병자가 된다 ―― 는 내용으로 사회가 현인(贅人)을 용납 안하는 세태를 풍자한 것이다.

나그네[편집]

1937년 4월 24일 개봉, 성봉영화사(聖峰映畵社)와 일본의 신흥키네마가 공동 제작했다. 감독·각본에 이규환(李圭煥), 배역에 문예봉·박제행(朴齊行)·왕평(王平). 이 영화는 한국 발성영화사상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긴 작품으로, 이규환의 <임자없는 나룻배>에 이은 수작(秀作)이었다.

수난기의 한국영화[편집]

수난기의 한국영화[편집]

受難期-韓國映畵 1935년 발성영화가 나온 후 1939년까지를 ‘발성영화시대’라고 명명한다면 이후 1940년부터 1944년까지의 시기는 문자 그대로 한국영화의 수난기라 하겠다. 일본제국의 발악적인 한국문화 말살정책의 일환으로서 소위 ‘조선영화령’이라는 것이 당시 조선총독부의 제령(制令) 제1호로 공포되었고, 뒤이어 일본제국주의의 어용단체(御用團體)인 조선영화제작자협회가 창립되었다. 또한 1942년에는 자구지책(自救之策)으로 역시 일제의 전쟁 수행을 합리화시키는 영화를 제작하는 것을 목표로 특수법인(特殊法人) 조선영화주식회사가 설립되기도 했다. 이리하여 일부’지조파 영화인’들은 영화계를 떠나 은신해버리는 등 암흑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복지만리[편집]

福地萬里 1941년 3월 개봉된 영화로 고려영화협회가 제작했고, 중국 상하이에서 귀국한 전창근(全昌根)이 각본·감독·주연을 맡았다. 이 밖의 출연진은 유계선(劉桂仙)·전옥(全玉)·전택이(田澤二) 등이었는데 상영되자마자 이 영화가 배일사상(排日思想)을 담은 영화라 하여 전창근이 100일 동안이나 옥고(獄苦)를 치렀다.

반도의 봄[편집]

半島- 1941년 개봉된 명보영화사(明寶映畵社)의 작품으로, 김성민(金聖珉) 원작, 이병일(李炳逸) 각색·감독이었고, 배역은 김소영(金素英), 김일해(金一海), 서월영(徐月影), 윤정란(尹貞蘭) 등이 맡았다. 내용은 영화 제작자(김일해)와 무대 출신의 신인 배우(김소원)의 애절한 사랑을 그린 것으로, 통속적인 주제였다. 이 영화로 이병일이 감독으로 데뷔했다.

광복·전쟁기의 한국영화[편집]

자유만세[편집]

自由萬歲 1946년 10월 고려영화사 제작의 영화로, 기획 최완규(崔完奎), 각본 전창근, 감독 최인규(崔寅奎), 촬영 한형모(韓瀅模)였고, 출연은 황려희(黃麗姬)·전창근 등이다. 광복 이후에 제작된 영화 가운데서 가장 절찬을 받은 바 있다.

안중근 사기[편집]

安重根史記 1946년 3월 개봉된 영화로, 감독은 이구영이 맡았다. 안중근이 나라를 위해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기백으로 일본의 전 총리대신이며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만주의 하얼빈역까지 미행해 그를 저격한 후, 다렌 형무소에서 이슬로 사라질 때까지의 일대기(一代記)를 그린 것이다.

윤봉길 의사[편집]

尹奉吉義士 1947년 7월 개봉된 영화로 각본·감독에 윤봉춘(尹逢春), 배역은 이경선(李慶善)·고춘희(高春姬)였다. 내용은 중국으로 망명한 항일 투사이자 풍운아인 윤봉길의 의거를 감동적으로 그린 것이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편집]

韓國映畵評論家協會 1950년 6월, 뜻하지 않았던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전 국토는 전란에 휘말리게 되었고, 이 북새통에도 영화인들은 끈질기게 영화를 제작하였는데(일부 영화인들은 군에 從軍했다), 1950년 9월 10일에는 임시 수도 부산에서 한국영화계의 부흥·재건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한국영화평론가협회(韓國映畵評論家協會)가 구성·발족되었다. 초대 회장에 오종식(吳宗植), 회원 오영진(吳泳鎭)·김소동(金蘇東)·유두연(劉斗演)·이봉래(李奉來)·이정선(李貞善)·허백년(許柏年)·박인환(朴寅換)·이청기(李淸基)· 황영빈(黃榮彬)·이진섭(李眞燮) 등이 중요 멤버였다. 그 뒤 1954년에는 제1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이 제정되어, 예술적인 면에 공적이 많은 영화와 영화인에게 수상했고, 기타 영화 저널리즘 확립에 기여했다.

정의의 진격[편집]

正義-進擊 1951년 국방부에서 제작한 영화로 전쟁 당시 국군들의 실전(實戰)을 직접 기록한 작품이었다. 당시의 촬영 기사가 거의 참가했는데, 이 중 촬영기사 김학성(金學成)이 촬영도중 총상을 입기도 했다.

악야[편집]

惡夜 1952년 7월 15일 개봉된 영화로, 신상옥(申相玉) 프로덕션이 제작했으며, 원작에 김광주(金光洲), 감독에 신상옥(申相玉), 출연에는 황남(黃男)·문정숙(文貞淑) 등이다. 이 영화에서 신상옥은 감독에, 문정숙은 배우로 각기 데뷔했다.

고향의 노래[편집]

故鄕- 1954년 5월 개봉된 영화로, 이구영 각본, 윤봉춘(尹逢春) 감독, 이선경(李善慶)·김신재(金信哉)가 주연한 영화였다. 환도 후에 제작된 영화 가운데서 가장 주목을 받은 작품이었고, 제4회 서울시 문화상 영화 부문상을 수상했다.

중흥기의 한국영화[편집]

중흥기의 한국영화[편집]

中興期-韓國映畵 1954년 3월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국산영화’의 보호 육성책의 일환으로 입장세법(入場稅法)을 개정하여 국산영화관람에 따르는 입장세의 전면적인 면세조치를 법제화하여 정식 공포함으로써 이 땅의 영화인들에게는 적잖은 고무가 되었다.

춘향전의 흥행성공[편집]

春香傳-興行成功 1955년 1월 개봉된 영화로 동명영화사가 제작했고, 감독에 이규환, 출연에 이민(李敏)·조미령(趙美鈴)·노경희(盧耕姬)·전택이 등이었다. 환도 후 최대의 흥행기록을 수립한 성공작이었다.

아시아영화제 수상[편집]

Asia映畵祭受賞 1957년 제4회 ‘아시아영화제’에 이병일 감독의 <시집가는 날>이 출품되어 희극상을 타고, 또 1960년 제7회에서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로 김승호가 남우주연상을 탔다. 강대진 감독의 <마부(馬夫)>가 1961년 제11회 백림영화제에 출품되어 격찬을 받았다.

성춘향과 컬러 시네스코[편집]

成春香-colar cinesco 1961년 신상옥이 만든 한국 최초의 컬러 시네마스코프(color cine­mascope)였는데, 이 영화는 제작과정에서 홍성기의 <춘향전>과 치열한 경작(競作)을 벌였고, 흥행적으로는 35만명이라는 관객을 동원하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오발탄[편집]

誤發彈 이범선(李範宣)의 동명소설을 유현목(兪賢穆)이 감독한 영화로, 1960년 완성되었으나, 상영이 보류, 1961년에 개봉되었다. 김진규(金振奎)·최무룡(崔戊龍)·문정숙(文貞淑) 등이 출연했던 이 영화의 특징은 대사 위주를 지양하고 영상주의적(映像主義的)인 표현을 시도(試圖)한 점이다.

김승호[편집]

金勝鎬(1917-1968) 1946년 전창근 감독의 <해방된 내 고향>에서 데뷔. 이후 <인생차압> <돈> <마부(馬夫)>에서 괄목할 만한 연기를 남겼고, 1957년 <로맨스 빠빠>, 1958년 <박서방>, 1963년 <로맨스 그레이>, 1967년 <역마(驛馬)> 등에서 4회에 걸쳐 ‘아시아영화제’ 주연 남우상을 획득했으며, 국내 영화제상 또한 많이 수상했으나, <돌무지> 영화 제작을 마치고, 빚과 과로가 겹쳐 한(恨)과 영광 속에서 배우의 일생을 끝마쳤다.

청춘영화와 신성일[편집]

靑春映畵-申星一 1960년대 (1963-1968)를 풍미(風靡)했던 청춘영화의 주인공 신성일(申星一)은 <맨발의 청춘(靑春)> <성난 능금> <청춘교실(靑春敎室)> <용서받기 싫다> <배신(背信)> <바람난 고양이들> <학사주점(學事酒店)> <푸른 별 아래 잠들게 하라> <란(蘭)의 비가(悲歌)> <흑맥(黑麥)> <초우(草雨)> <초연(初戀)> 등에서 당시 젊은 세대의 감각을 연기를 통해 대변함으로써 은막(銀幕)의 새로운 우상(偶像)이 되었다.

갯마을[편집]

오영수(吳永壽)의 동명소설을 김수용(金洙容)이 감독한 영화로 1965년 제작되었다. 신영균(申榮均)·고은아(高銀兒)가 주연한 이 영화는 그당시 붐을 이루었던 문예물영화(文藝物映畵)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서 특히 바다의 숙명(宿命) 속에 사는 인간상(人間像)을 아름다운 영상미(映像美)로 묘사한 영화였다.

만추[편집]

晩秋 김지헌(金志軒)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이만희(李晩熙)가 감독한 영화로 신성일(申星一)·문정숙(文貞淑)이 주연한 이 영화의 특징은 영화기법의 혁신을 보여, 재래식 스토리 텔링에서 벗어나 영화언어(映畵言語)를 통한 영상 위주(映像爲主)의 화면을 창조한 점이다. 1966년 제작.

불황기의 한국영화[편집]

세계적인 추세인 영화산업의 불황(不況)은 1968년경부터 한국에서도 고개를 들기 시작하더니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그 정도가 점점 심하여 위급한 상황으로까지 몰고 갔다. 당시 문공부는 ‘영화법(映畵法)’에 따른 우수영화 선정 등을 통해 불황타개책(不況打開策)을 모색했고 영화진흥공사는 이에 보조를 같이 했지만 쉽게 풀려나지 못했다.

증언과 국책영화[편집]

證言-國策映畵 영화진흥공사가 각 영화사에 대한 제작비 융자사업(融資事業)과 병행해서 자체 제작으로 <증언(證言)> <바보들의 행진(行進)> <들국화는 피었는데> <태백산맥(太白山脈)> <잔류첩자(殘留諜者)> 등 5편을 일반 영화사의 제작비보다 2, 3배나 들여서 완성시켰다. 그 중 1973년 제작한 임권택(林權澤) 감독의 <증언(證言)>은 6·25의 비극을 극화한 전쟁물로서 신일룡(申一龍)·김창숙(金昌淑)이 출연한 국책(國策)영화였는데, 일본·미국 등 여러 나라에 수출되기도 했다.

별들의 고향[편집]

-故鄕 최인호(崔仁浩)의 인기 소설을 신예(新銳) 이장호(李長鎬)가 감독한 영화로 출연진에는 안인숙(安仁淑)·신성일(申星一)·윤일봉(尹一峰) 등이었고 1974년에 개봉되었다. 이 영화는 당시 불황(不況)에 허덕이던 한국영화계에 기적(奇蹟)처럼 등장한 작품으로, 서울 개봉관에서만 46만 5천명이라는 경이적인 관객동원을 했다. 젊은 관객층에 맞도록 젊은 감성으로 호소하는 고급 멜로드라마였다.

삼포 가는 길[편집]

森浦- 황석영(黃晳映)의 동명소설을 이만희(李晩熙) 감독이 영화화했으며, 1975년에 개봉되었다. 이 영화는 특출한 작가정신(作家精神)을 보였던 이만희(李晩熙) 감독의 유작(遺作)이기도 한데, 설경(雪景)의 인생항로를 통하여 고향을 잃은 자들의 애환(哀歡)을 밀도 있게 그린 역작이었다.

하이틴 영화의 등장[편집]

-映畵-登場 1975년 김응천(金應天) 감독의 <여고 졸업반(女高卒業班)>이라는 여고생물인 하이틴 영화는 그 후 쏟아져 나온 문여송(文如松) 감독의 <진짜진짜 잊지마> 시리즈와 일본 번안물인 <정말 꿈이 있다구>로 이어지다가 석래명(石來明) 감독의 <고교얄개> 시리즈와, 김응천 감독의 <고교우량아(高校優良兒)>, 정인엽(鄭仁燁) 감독의 <고교결전(高校決戰) 자! 이제부터야>라는 일종의 남고생물 하이틴 영화의 붐 현상을 일으키기도 했다.

겨울여자의 흥행기록[편집]

-女子-興行記錄 조해일(趙海一)의 동명소설을 김호선(金鎬善) 감독이 영화화한 이 영화는 <별들의 고향(故鄕)>이 세운 관객동원 기록과 외화의 기록을 모두 갱신(更新)하면서 60만 5천명의 관객를 동원했는데, 내용은 새로운 여성상(女性像)을 통한 현대 애정 모랄의 대담한 개혁(改革)을 감각적(感覺的)인 영상(映像)을 통하여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장미희(張美姬)·김추련(金秋鍊)·신성일(申星一)이 출연하였으며, 1977년에 개봉되었다.

80년대의 한국영화[편집]

80년대에 접어들어 영화계는 60년대 이래의 호황기를 맞이하였다. 초반기에 <병태와 영자>(하길종 감독), <애마부인>(정인화감독), <0孃의 아파트>(변장호 감독) 등으로 다소 활기를 띠었지만 영화법개정에 따른 제작자들의 불안심리와 제작 의욕상실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러한 경향으로 외설물·폭력물·멜로드라마·코미디가 주종을 이뤄 오히려 외국영화가 좋은 흥행성적을 올리기도 했다. 85년에 영화법 개정안이 실현되면서 개방화, 자유화라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해서 스크린 쿼터제가 강화되었으며 몇 년간의 깊은 침체에서 벗어나 흥행면에서나 작품의 질적인 수준면에서 모두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다. 87년은 국제적으로 우리 영화의 명예를 빛나게 했다. 제44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강수연(姜受延)이 최우수여우상을 획득한 것을 비롯, 제32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의 작품·감독·남우주연·여우주연 등 4개 부문의 수상, 그리고 제2회 동경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연맹상 수상 등은 한국영화를 국제무대에서 뚜렷하게 부각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한편 87년 제작업계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구(舊)제작업자들을 밀어내고 신진영화제작업자들이 제작업계를 주도하는 새 세력권을 형성하는 등 감독부문의 영파워 물결로 여러 젊은 감독들이 젊은층의 호응을 얻을 수 있는 소재를 기성 감독들과는 다른 패턴의 연출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89년에는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제42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그랑프리인 금표범상 수상, 제16회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강수연이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최우수여우상을 획득하는 쾌거를 올렸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89년 영화계는 방화는 물량면에서는 80년대에 들어 최대제작이 이뤄졌으나 수준은 답보상태에 머물러 심각한 우려를 낳았고, 외화직배문제로 외화수입물량이 폭증하여 영화계가 사분오열되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영화 제작자들의 모임인 영화업협동조합에서 유력회사인 태흥영화사와 황기성사단 등 25개사가 탈퇴, 제작자협회라는 별도의 대항 단체를 만들게 되었다. 영화계 분열, 외화폭주라는 부정적인 현상이 한 해를 지배한 가운데 영화진흥공사 부설 영화아카데미 출신들을 주축으로 한 30대 전후의 젊은 영화인들이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독립 프로덕션을 창설, 지금까지의 실험적 수준의 작품에서 벗어나 완성도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기 시작, 청기사그룹은 <비오는 날의 수채화>로 황금촬영상을 휩쓸었고 시네피아의 <회색도시 2>는 좋은 영화로도 선정되는 등 가능성을 엿보였다. 또 공산권과의 교류에 있어서는 88년이 중국과 소련의 영화가 국내에 처음으로 들려온 한 특징이 있었다면 89년은 헝가리에서 한국영화주간이 열리는 등 공산권 교류가 가속화된 한 해였다.

깊고 푸른 밤의 흥행기록[편집]

-興行記錄 85년 들어 서울 개봉관에 붙여진 방화는 69편, 외화는 27편이었는데, 방화는 <깊고 푸른 밤> <어우동>이 각각 상·하반기에 걸쳐서 히트를 기록하였다. <깊고 푸른 밤>은 배창호(裵昶浩) 감독이 최인호(崔仁浩)의 소설을 영화화하였다. 출연진으로는 안성기·장미희가 각각 남·녀 주연으로 열연하였다. 미국 올 로케이션인 이 영화는 85년도에 개봉되어 92만 5천 9백명을 동원함으로써 당시 한국영화 최고의 동원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제30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으며 원작·각본을 맡은 최인호(崔仁浩)가 각본상을 수상했다.

영화법 개정[편집]

映畵法改正 영화법 개정안이 86년 12월 18일 국회에서 가결됨에 따라 외국인이 국내에서 영화업을 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번 개정안의 골자는 외국인이 영화법 허용과 함께 외국 영화수입에 따른 한국영화진흥기금 폐지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84년말 개정된 영화법이 다시 개정된 것은 순전히 미국의 한국영화시장 개방압력에 따른 것이다. 이 법이 87년 7월부터 시행되어 미국영화사가 한국에서 영화업을 할 수 있게 됐다. 또 이 개정안에서 영화진흥공사와 국립영화제작소는 통합없이 그대로 존속케 됐으며 정부가 영화진흥공사의 운영 및 사업에 충당하기 위해 필요할 때는 예산의 범위 안에서 보조금을 교부할 수 있도록 했다.

영화 소극장 등장[편집]

映畵小劇場登場 영화가에서는 불황을 극복하려는 방책으로 소극장운동을 전개하였다. 80년 초 푸른극장 ‘태멘’을 필두로 해서 대두되었으며, 이러한 소극장의 이점은 광고비 및 인건비와 시설관리비를 절약할 수 있고 지역 특성에 맞는 영화의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1일 2,000명 이상의 관객이 들어야만 수지타산이 맞는 대극장과는 대조적으로 소수 관객의 꾸준한 동원이 가능하다는 것 등이다. 푸른극장(태멘)이 700석 규모로 젊은이들의 문화적 공간이라는 기치를 내걸었으며, 영등포의 명화극장도 각종 레저 타운을 겸하고 있어 바야흐로 극장환경의 일대 전환기가 마련되었다.

90년대의 한국영화[편집]

80년대 후반에 한국영화계를 침투했던 UIP의 미국영화직배는 이제 우리 영화계를 위협하는 두려운 존재로 그 실체가 드러났다. 이에 대항해온 뜻있는 한국영화인들은 전체 영화인들의 힘을 결집시켜 조직적인 직배저지 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한국영화 거듭나기를 실천하는 수준작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90년대 한국영화계의 주요 흐름을 정리해 볼 때, 88년 UIP의 직배영화 <위험한 정사>의 국내 첫 상영으로 위기의식을 느낀 한국영화계는 한국영화 거듭나기를 위한 한국영화법 개정을 비롯하여 UIP의 직배저지 투쟁을 전개해 전체 영화인을 심기일전시켰다. 그러나 일부 영화인의 사욕은 내분을 자초해 영화인의 치부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 결과, 한국영화 관객의 반응은 냉담했고 그 틈을 타서 미국 직배영화는 파죽지세로 전국영화관을 장악했다. 서울시네마타운의 <사랑과 영혼>은 사대문 안에 위치한 개봉관에 첫 입성한 직배영화로, 한국영화인들은 국내영화산업은 종말이 왔다고 우려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을 경고했다. 이렇게 한국영화 제작업계와 극장가의 혼란 속에서도 한국영화는 수작들이 많았다. 소시민의 생활을 솔직하고 담백하게 그린 장선우 감독의 <우묵배미의 사랑>과 신승수 감독의 <수탉>, 눈먼 소녀와 어린 남매의 시각으로 잃어버린 고향과 휴머니즘의 말살을 고발한 서정적이고 수려한 박철수 감독의 <오세암>, 전과자의 일생을 꾸밈없이 전개한 이두용의 <청송으로 가는 길>, 그리고 80년대 사회상의 혼란을 탄광촌을 무대로 드러내보인 박광수 감독의 <그들도 우리처럼>과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하는 보수적 한국남성사회의 모순을 고발하는 김유진 감독의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등을 거론할 수 있겠다. 또한 한국영화의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기획하여 한국영화사상 최다의 관객을 동원한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과 분단 이데올로기의 문제에 정면도전한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 그리고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북에서 탈출한 신상옥의 첫 작품 <마유미>는 대작 영화로서 각자 나름대로 한국영화의 부활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밖에도 <코리안커넥션> <꿈>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미친 사랑의 노래> <물위를 걷는 여자> 독립프로덕션의 <부활의 노래>, 비제도권의 <파업전야> 등은 90년대에 한국영화 거듭나기를 확인해 주는 실체들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러한 시점에서 통일독일의 소식은 세계유일의 분단국가로 남겨진 이 땅에도 영향을 미쳐 뉴욕 남북영화제를 개최하게 하였고 그 파급은 북한영화의 대학가 상영과 함께 북한 영화 수입개방의 논란에까지 이르렀다. 한국영화인의 바람대로 빠른 시일 내에 영화법이 개정되어 한국영화 창작의 활성화를 도모하고 외국직배영화로부터 한국영화를 보호하거나 진흥하는 획기적인 조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과감한 행정적 조치가 없이는 한국영화의 거듭나기는 좌절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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